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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스물아홉 반의 보고서

by 민그라운드 2022.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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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이다.

 

지난 29년 간의 삶을 되돌아보면 항상 이 시기에 '반년 동안 도대체 나는 무얼 했나'하는 한탄 섞인 말이 나왔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남은 반년은 지난 반년보다 3배는 더 빠르게 지나갈 것임을.

 

7월 말부터 휴가가 시작될 예정이었기에 8월도 금방 가는 기분이 들 것이며, 9월 말에는 추석도 껴서 거의 순삭일 것이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면 2020년, 내 스물아홉도 한 분기만 덩그러니 남아있게 될 것이 뻔했다.

 

20대를 정리해보자는 각오로 시작된 2020년이지만 모든 것이 시원치 않았다. 충분한 생을 산들 '29살'은 또 처음이었기에, '30살'은 또 초면이었기에 미숙한 날들이 한 땀, 한 땀 비뚤빼뚤 박음질되는 중이다.

 

돌아보면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내 생에 가장 이벤트가 많았던 반년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1월 초에는 난생 처음 이모와 엄마를 모시고 호캉스를 다녀왔고(1차 출혈), 2월에는 아빠와 함께 포항으로 환갑여행(2차 출혈)을 다녀왔다. 그때는 너무 돈이 들어갈 곳이 많아 조금 미룰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꼼짝도 못 하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올해 가당 잘한 일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늘 그랬듯 1분기는 사나웠고 힘들었다. 첫 전세집을 구하는 과정에서도, 가전을 채우느라 허리가 휜 것도, 일과의 권태기 그리고 할머니를 잃은 슬픔까지. 지긋지긋했던 바퀴벌레 사건도 뺄 수 없다.

 

도대체 구멍이랑 구멍은 다 막았는데 어디로 들어온 거냐면 방금 물린 모기 자국을 벅벅 긁으며 생각해본다. 참 부단히 도 노력했으나 끊임없이 게으른 시간이었구나. 이런저런 핑계로 툭하면 슬럼프에 빠지는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으나 유독 큰 사건이 많았다 보니 쉽게 무너져 내렸다.

 

그나마 칭찬해주고 싶은 것은, 그래도 일련의 사건들을 스쳐 지나왔다는 것이다.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일상을 지키려 노력했던 날들을 칭찬하고 싶다.

 

아직도 어린 나이지만 아주 조금씩 나이듦의 축복이라 불리는 '망각'이 스며들고 있다. 병적으로 기억에 집착하던 내가 어느 순간 하루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길거리를 다닐 수 있는 것은 이 망각의 축복 덕분이었다.

 

그래서 그다지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아쉽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꾸준히 재작년보다 작년이, 작년보다 올해가 더 좋았으니까. 어차피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무엇이라도 누적되고 있으니 내년의 나는 더 상태가 좋지 않을까? 가지지 못해 안달 났던 순간들도 지나가니 손에 잡혔다. 꽉 쥔 손으로는 아무것도 잡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느슨해지니 머무르는 것이 많아졌다.

 

그래도 아쉬운 것은 아무런 준비없이 서른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계획을 부분 수정하고 노트북을 사고 타자를 친다. 내년의 나는 조금 더 준비된 사람이길 바란다.

 

온전히 하나의 몸으로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것의 도움 없이도 두 발로 땅을 지탱할 수 있는 그런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이제야 나를 반 정도는 알 것 같다. 20대를 돌이켜보면 행복한 순간이야 많았지만 너무 불안한 순간들이 더 많았다. 영원히 그대로일 것 같았던 모든 불행들이 시간이 지나자 흐려졌다. 흐려진 불행의 흔적들 뒤로는 추억이 남았다.

 

그리고 한 가지 반성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너무 큰 행복에 집중해 작은 행복들을 놓쳤다는 것이다. 욕심을 내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지만 남은 시간 동안은 가지게 될 것들보다 가지고 있는 작은 것들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소중히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연습을 해야겠다.

 

상태 좋은 반년 뒤를 기약하며.

 

 

 

2020. 01

 


 

브런치에 발행한 글을 옮겨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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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crystal4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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