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설은 집에 내려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나에게 관심도 없는 어른들이 건네는 무의미한 말에 하나하나 상처받는 내가 싫어졌기 때문이다. 왜 그동안 그런 학대에 가까운 상황들을 참고 견뎠는지 모르겠다.
부모님께는 "성공하기 전까지는 명절에 집에 안 내려가!" 당차게 말했지만, 글쎄 성공이 뭔지 해봐야 알지. 쓸쓸하면서도 혼자 보낼 생각으로 설레는 연휴의 시작은 자연스레 술과 함께 하기로 했다.
나의 위대하고도 쪼들리는 술의 역사는 올해로 10년 차를 맞이한다. 그 나이 때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 대학교 예비대에서 소주라는 것을 처음 맞보았었다. 하지만 그날을 음주라는 본격적인 행위의 인트로로 정하기엔 소주가 너무 맛이 없었다.
아무래도 스무살의 나는 지금과는 달리, '부어라, 마셔라' 분위기로 술을 먹었던 모양이다.
정식으로 음주 인트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가장 친한 친구가 된 J와의 술자리였다. 지금도 만날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하는데 어쩌다 별로 친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술을 마시러 가게 된 건지, 그 이유가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했던 것은 그날의 술자리가 너무 재밌었다는 것이다. 소주도 달았다. 포차에서 나와 기숙사로 걸어가는 길 위의 나는 취하지는 않았음에도 그 순간에 느꼈던 모든 것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상기된 볼 위로 머무르는 3월의 알싸한 바람, 조금씩 퍼지는 봄 기운으로 묘하게 공기도 들떠있었다. 그날의 느낌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기쁘게도 그 J가 연휴 음주가무 파티 파트너로 선정되었다. 장소는 성수. 놀랍게도 내 인생 첫 성수였다. 오늘은 연휴 시작일이니 J가 월급 루팡을 하겠다며 열심히 찾은 곳이 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였다.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대기 중이었다. 하지만 대기하면서도 팔찌 태그 시스템 덕분에 맥주를 마실 수 있어서 기다림이 지루하지 않았다. 그 이전에 마셨던 수제 맥주들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아서인지 걱정하며 마신 첫 모금은 정말 최고였다.
수제 맥주 마니아들은 수제 맥주만 마신다더니, 이래서 사람은 경험에 갇힐 필요가 없다.
두 잔을 넘어 세 잔의 두 모금쯤 드디어 테이블이 생겼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일 이야기와 가족 이야기.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일에 치여 살다 보니 자주 만나는 것이 어렵다 보니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물론 매일 카톡은 하지만 이렇게 한 숨과 함께 휴지를 찢어대는 손가락, 약간은 체념한 듯한 표정을 해보일 때면 '내 생각보다 내 고민이 이렇게 깊었구나'하고 오히려 가볍게 생각하게 된다. 이것도 아마 술의 힘일 것이다.
그리고 나보다 어른스러운 J와 이야기하다 보면 나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된다. 동료에게 옹졸하게 굴었던 모습이나 까칠하게 거절했던 모습, 무리해서 긁어댄 카드나 마음이 좁아져 내려가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술을 마시다 보면 도원결의처럼 그 술을 직접 나눠 마시지는 않아도 정신적으로는 많은 것이 공유된다.
짠하고 함께 들이키는 한 모금과 따라 나오는 탄성, 본능적으로 뻗게 되는 안주. 생을 짓눌러왔던 문제들이 그 탄성과 함께 빠져나온다.
비록 다시 돌아올 무게라 할지라도 마시는 그 순간만큼은 가슴이 뚫린다. 아마 나는 친구와 마시는 술을 스무살에도 지금에도 끊지 못할 것만 같다. 스무 살의 나는 알았을까. 이렇게 술에 의지하는 어른이 될지, 일하고 나서 마시는 술을 최고로 치는 평범한 어른이 되어 버릴지.
어린 시절, 힘든 육체 노동을 마치시면 항상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하나와 당신의 몫이 될 소주 한 병을 든 채 귀가하시는 아빠가 조금 미웠던 적이 있다.
아이스크림이라는 뇌물을 꼬박꼬박 얻어먹으면서도 맞은편에 않아 잔소리를 해대는 딸에게 '좋은 데이'는 술도 아니라며 사랑스러운 투정을 부리시던 아빠의 마음을 알아버린지도 벌써 5년 차가 되었다.
우리 아빠는 알까, 이제는 나도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산 맥주를 아빠와 똑같은 표정으로 마시게 되었다는 것을.
2020. 01
브런치에 발행한 글을 옮겨온 글입니다.
이곳에서 가장 최근의 에세이를 볼 수 있어요. 😀
https://brunch.co.kr/@crystal4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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